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장계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이 벌어지자 장파쿠이는 농해(隴海) 철로 수비를 명령받고 [[펑위샹]] 토벌에 동원되었으나 [[편견회의]]와 정치분회 폐지 등 장제스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국민혁명]] 기간 중에 장제스와의 악감정도 있었으므로 9월에 반장파에 합류, [[왕징웨이]]와 [[서산회의파]]의 장제스 비판에 호응하여 반장을 호소하는 통전을 보냈다. 여기에 광서성 주석 유작백(兪作柏)과 사장 이명서(李明瑞) 등 [[계계군벌]]의 잔당이 호응하여 1929년 9월 7일 광서성의 독립을 선언하여 장파쿠이와 합세, 호당구국군을 조직하고 광동으로 진격했다. 장파쿠이의 병력은 석문, 자리, 도원을 통과하여 서포, 신화, 안화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농성하였다. 장제스는 9월 20일 장파쿠이를 면직시켰고 사천과 호남의 병력으로 장파쿠이 토벌을 명령했다. 10월 7일 장제스가 광동성 수정주임 [[천지탕]]에게 장파쿠이 토벌을 명령하였고 천지탕의 광동군이 오주 방면에서 광서로 진격했다. 광서군 간부 양등휘(楊騰輝)는 항복하였으나 유작백은 용주로 달아났다. 이 와중에 [[2차 장풍전쟁]]이 얼아났고 [[봉소전쟁]]이 벌어져 소련군이 만저우리를 점령한 가운데, 장파쿠이가 광서 북부로 이동하여 1929년 11월 16일 공성에서 광동탈취를 선언하고 호당구국군 제8로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이에 유작백을 대신한 신임 광서성 주석 여염환이 합류하고 [[리쭝런]]의 잔당이 호응하였다. 국민정부는 안휘성 정부주석 [[스여우싼]]에게 광동 방위를 지시하는 한편 [[허잉친]]을 광동 행영 주임으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령했다. 허잉친은 수개 사단을 지휘해 12월 2일 광저우에 도착했고 12월 10일 광저우 북부 50킬로미터 지점인 화현에서 장파쿠이 군대를 격파했으며 12월 19일 광서성 오주에서 다시 반란군을 섬멸하였고 이로서 2차 장계전쟁도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